귀엽지 않다, 육아의 일상은. 아이는 참 귀여운데 말이다.

첫째(아들)가 돌이 되기 전 6개월의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아내가 출근하고 늦은 오전, 아이가 깨면 남자 둘의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된다. 이유식을 만들고, 먹이고, 씻기고, 아이가 지나간 혼돈의 자리들을 닦고 치우고. 첫째는 정말 잠을 늦게 잤다. 자고 싶을 때 잘 수 없다는 점이 힘들었다. 내 의지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정신적 체력 소모가 몸도 지치게 했다. 자존감이 낮아질 무렵,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육아를 실천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내가 좋아하는 농구를 아기 농구대로 같이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을 아이와 나섰다. 아이에게 온전히 맞추는 희생보다 자신의 행복을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느껴졌다. 일상을 채우는 아이의 미소가 그 점을 증명했다.

둘째(딸)가 태어났을 때도 자연스레 육아휴직을 생각했다.

특히 아이가 어릴 때 아빠가 아이들을 더 돌보고 안아줘야 출산 과정을 겪은 아내가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째가 돌이 될 무렵 두 번째 육아휴직, 이번에는 1년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첫째 때의 경험이 몸에 익은 만큼 육아 샅바 잡는 일이 수월했다. 일상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육아는 여전히 어려웠다. 첫째보다 더 활발한 둘째는 밤마다 안자고 크게 울었다. 옆집에 소음이 될까 봐 나는 둘째와 바라지 않는 야밤의 데이트를 했다. 돌아보면 그 밤들이 둘째에게는 조금 몽롱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선명한 추억이 됐다.

지난 6월 복직을 했다. 아내가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출근하면, 내가 퇴근길에 아이들을 하원한다. 퇴근 후에는 아이들에게 집중한다. 아내와 나는 육아나 돌봄의 역할을 분담하지 않는다. 분명 각자 더 잘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겠지만, 날마다 둘의 컨디션도 다르고, 아이들의 상황도 다르다. 육아의 역할을 구분하는 순간, 본인 몫이 끝나면 긴장을 풀게 될 수도 있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끝이 없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내 배우자가 편하다. 그리고 배우자가 편하면 그 에너지와 행복이 또 나와 아이들에게 향한다. 아내도 나와 같다. 아내가 최선을 다해준 날은 내가 에너지를 남긴다. 이 에너지가 또 아내와 아이들에게 간다.

복직한 지 4개월여 지난 시점. 유연근무제와 더불어 육아 상황을 이해해 주는 상사들의 배려 덕분에 복직 후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육아휴직 때와 달리 회사 차원에서 복직자를 위한 교육도 있었다. 회사 전반의 상황과 더불어 회사 구성원이자 아빠로서 어떻게 건강하게 균형을 맞춰 생활해야 할지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아빠인 내 모습을 봐주는 회사는 곧 내 아이들을 생각해주는 회사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긴다. 등·하원은 항상 걱정이고, 언제 아플지, 어떻게 다칠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부모들은 그런 불안감을 이고 책상에 앉는다. 그런 고민과 더불어 육아의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회사가 사내 육아 커뮤니티를 적극 권장하면 어떨까. 상황이 가능한 회사라면 자녀의 학부모 상담, 운동회 날 등 자녀와 함께하는 날에 휴가를 편히 쓸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좋겠다.

‘아빠 육아’라는 말이 이제는 더 이상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글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아빠로서의 육아가 어려운 지점들은 여전히 있다. <육아휴직, 또 다녀왔습니다>라는 책을 쓴 데에는 분명 그런 어려운 지점들을 전하고 공감을 끌어내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아빠 육아에 같은 아빠들도, 아내들도, 여러 회사도, 우리 사회도 한 번씩 관심을 가져보고 응원해 주길. 그 응원에 힘입어 어느새 모든 아빠가 ‘당연히’ 육아에 임해서 ‘아빠 육아’라는 말을 도리어 어색하게 만들 수 있길 바란다.

‘아빠 육아’가 아닌 ‘육아’로, ‘맞돌봄’이 아닌 ‘돌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