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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지적장애 판정, 저를 길러주신 할머니의 별세, 그리고 유류분 소송까지

2020년과 2021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장애가 있는 아버지를 돌보며 경제적 부담까지 감당해야 했던 저는, 꿈이던 연기자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몰랐습니다. 저의 이 고단한 일상이 ‘영케어러(Young Carer)’라는 이름을 가진 삶이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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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케어러’**란 질병, 장애, 중독 등으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가족을 돌보는 34세 이하의 아이나 청년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케어러의 돌봄 대상은 단순히 부모나 형제자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장애가 있는 삼촌, 자신을 키워준 조부모, 또는 한국어가 서툰 부모를 대신해 통·번역을 맡는 이주배경 자녀들 역시 영케어러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이름 없이 돌보던 청년들’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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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들이 겪는 지속적인 심리적 고립감과 경제적 취약성입니다.

돌봄노동과 가족의 불안정한 건강상태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거나 직장을 잃고, 휴식조차 갖지 못하는 청년들

_이들의 일상은 늘 불안정합니다. 돌봄이 장기화될수록 우울, 소진, 신체적 질병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영케어러들에게는 ‘독립’과 ‘결혼’이라는 선택도 꿈만 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집을 떠나면 내 가족은 누가 돌볼 수 있을지, 혹은 가족을 돌보느라 나 자신도 챙기지 못하는 내가 새로운 가족이 생기면 그들을 돌볼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가족을 위한 헌신’이 ‘나의 삶의 중단’으로 바뀌는 현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할 구조적 과제입니다.

저 역시 아버지를 돌보며 가족심리상담 지원을 통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담 지원은 일회성으로 제한되어, 새로운 문제에 부딪힐 때 다시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장애인가족지원센터나 복지관의 서비스 대상에서도 청년 돌봄자는 종종 제외됩니다. 돌봄의 책임이 여전히 ‘가족 내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족돌봄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합니다.

“인식 개선, 돌봄자와 돌봄 대상자의 욕구 조사, 심리 정서 지속적 지원, 사회적 고립 및 위축 정도 파악, 경제적 빈곤 여부 파악, 성폭력 및 사기 예방 등 통합적인 지원이 활성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돌봄은 ‘개인의 의무’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영케어러뿐만 아니라 노부모를 돌보는 중장년층, 배우자를 돌보는 노년세대 모두가 안정적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체계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가족센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센터는 가족 내 갈등과 돌봄의 부담을 조기에 발견하고, 심리·정서 지원과 지역자원 연계를 통해 돌봄자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영케어러를 위한 정서상담, 진로연계, 휴식 지원 프로그램이 지역 단위에서 촘촘히 마련된다면, “돌봄자에게도 돌봄이 필요한 사회”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가지만, 그 돌봄이 누군가의 삶 전체를 잠식해서는 안 됩니다. _가족을 돌보는 것과 나 자신의 성장, 그리고 휴식은 함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_‘가족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란, 다양한 돌봄의 형태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지지받는 사회일 것입니다.

이름 없이 돌보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 우리는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 영케어러, 그리고 모든 가족돌봄자들을.